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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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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4 18:59 당나귀 기사

고난주간 채플 후기 - 수업과 예배 사이


한동대학교에서 채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학교의 근간과도 같은,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실무형 인재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이 가장 본질적인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다. 졸업을 위해서는 6학기 수강이 필수이고, 다른 1학점 수업과는 다르게-그렇다고 채플이 1학점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채플은 0학점이다-1주일에 75분을 온전히 할애하며, 다른 수업의 일반적 방침보다 엄격하게 3번만 결석해도 Fail이다. 교목실이 주관하고, 여느 수업에나 있는 강의 평가가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 영향을 받을 일도 없다. 그 말은 곧, 강의 평가를 통한 교육 서비스 질의 향상, 그럼으로써 대학이라는 콘텐츠의 업그레이드를 꾀하며, 궁극적으로는 언론사가 정해주는 기준-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는 그 기준-에 따른 대학 서열줄세우기, 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왜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개인적 추측으로는, 채플이 수업이 아니라 예배라고 주장하는, 학교 내에 만연한 암묵적 선언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수업 치고 지나치게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예배라고 하기에는 뭐한 것이, 그러니까, 가장 단적인 예로 보통 예배를 몇 번 빠지면 Fail을 주지는 않지 않나. 또 예배는 16번 중에 몇 번쯤은 빠져도 된다는 얘긴가. 만약 Fail을 맞았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Fail인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채플이란 건 영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탓에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에 대해 우리 죄를 사하시고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익숙한 신앙의 고백을 읊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주간, 성탄절, 추수 감사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 역시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다지 친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나와 기꺼이 친해질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내가 그것을 구하면 언제든 다가올 분이시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미안하고, 그래서 섣불리 다가가기 망설여지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미안해지고, 그 미안함이 또 더 큰 부담이 되는 악순환 속에 있다. 그러다 보니 앞서 말한 절기들에도, 평소에 돌아보지 못한 하나님을 생각해볼 구실로서만 여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죄책감이 있다. 그래도, 그래도 가식 같아서 관둔다는 자조로 넘기는 것보다는 낫다고, 다시 묵상해보는 것이 어쩌면 관계의 회복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편이 좋겠다고, 어김없이 이번 고난주간에도 되뇌었다. 마침 팀특송도 겹치고, 그것이 단순히 노래 한 곡으로 때우는 시간이 아니라 찬양을 올리는 시간이며, 나아가 회중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귀한 시간이라는 값진 인식 속에서, 결국 나도 채플을 어떤 예배로 여기어 보고 싶다는 기대를 품었다.

 

팀 특송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와 보니, 팀장 임명식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총장님이 직접 팀장들을 임명하고 계셨다. 이윽고 팀장들은 내려갔다. 총장님은 내려가지 않으셨다.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팝아트 색채의 ppt와 함께, 그는 꼿꼿한 고목처럼 서 있었다. 이윽고 총장님은 실리콘밸리를 첫머리로 하여 이런저런 창업과 창업 이야기를 하셨다. 아이디어 글로벌 창의 융합 스타트업 등, 도저히 그 자체로는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공허한 단어가 채플을 가득 채웠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매 학기 첫 채플은, 총장님이 특별히 채플 과목 수강생들에게 해주는 OT, 라고도 하기 뭐한, 그냥 모종의 사업 보고서나 계획서를 발표하는 시간이 아니던가. 첫째 주에 기대를 가지지 않게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둘째 주에는, 대개 한동인에게 들려주는 귀한 말씀으로, 인사 잘 하기, 분리수거 잘 하기, 술 담배 멀리 하기 등등의 소중한 공중 도덕+모범적인 크리스천의 자세 같은 것들을 들려주곤 했다. 인사 연습을 시키는 것도 아마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5주차이고, 고난주간이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실리콘으로 채찍질을 당하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혹은 고난 받고 부활하시는 전인류적 속죄의 드라마가 어떤 아이디어 넘치는 글로벌 창의 융합 스타트업의 과정이었단 말인가. 나는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에 명목상으로나 들추어보던 성경 구절은 성경의 자도 나오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출석하지 않으면 Fail하는 수업에서, 그것도 교목실 주관인데다 특별히 강의 평가도 받지 않는 성역에서, 누군가가 극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라고 주장하는 이 곳에서, 왜 나는 저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마치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아니라 사업 아이템을 들고 가라는 말로 들렸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총장님. 이제 성경 말씀을 들려주세요.(사진 출처: <당나귀> 디자이너 정모씨)

 

그런 상황에서 총장님이 그 채플의 온 시간을 다 할애하지 않고 내려오신 것은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건 총장님에 대한 비난의 의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외려 이것은 더 넓은 의미의 안타까움에 가깝다. 고난주간이라는 말의 의미가, 채플을 듣는 나와, 어쩌면 채플 자체에게 고난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전자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린도 켜고, 노래도 잘 하는, 정말이지 다재다능한 분이었다. 일제히 불이 꺼져서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공연에 있어서 조명은 중요한 요소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즐겼다. 즐기고, 싶었다.

 

그 분은 중간중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별로 연주도 잘 하지 않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학교에 합격했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지 않아서, 그 벌로 연주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팔-인지 손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을 아프게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더니, 다시 치유의 은사를 내려 주셔서 이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게 해 주셨다고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익숙하게 듣고, 그래서 더없이 친숙한 신앙 미담이었다. 그런 친숙함에 대해 쌓인 관습적 은혜와 감동이 좌중을 한 번 휘감았지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왜 알 수 없는지에 대해 알 수 없는, 혹은 차라리 알 수 없고 싶은 기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의 공연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술적 문제로 인해 제대로 나온 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단지 연주자 분이 안쓰러웠다.

 

모두가 안타까운 고난의 시간 끝에,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월드비전 후원 요청이 이어졌다. 앞의 알 수 없는 기분은 위화감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정체는, 그래서 이제까지의 그 모든 시간들과 고난주간이 어떻게 연관되냐는 의문이었다. 의문은 서서히 분노로 물들어 퍼져 갔다. 이 분노는 (미안하게도) 처참한 환경 속에서 열심히 공연하고, 간증도 하고, 후원까지 요청하신 분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시간을 참람할 정도의 어색함으로 만들어버린 기술적 문제만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팀장 임명식을 위해 나온 참이어서인지, 굳이 창업 얘기를 하고 내려가신 총장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고난주간이니 다 함께 일어서서 십자가 관련 찬양을 드리고 통성기도 한 번 한 뒤 무난무난 좋게좋게 끝내버린 교목실만을 향한 것도 물론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위의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그 외 내가 알지 못하는 구석구석을 대상으로 한 분노일 것이다.

 

간증 이후에 틀어진 영상은, 나레이션과 음악, 아프리카 아이들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담은 카메라 앵글, 그리고 지금 당장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한 증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으로 나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서 나는, 눈 앞까지 닥친 현재적 죽음을 박제하여서는, 그것을 재생하는 언제 어디에서나 그 위급함을 꺼내어, 관객으로 하여금 당위가 강하게 섞인 감정을 강요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정말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싫지만, 그럼으로써 감정에서 우러나온 후원으로까지 이어지도록 권유, 아니 강권하는 태도까지 보았다. 세월호로 죽은 사람들은 살릴 수 없지만, 이들은 여러분의 도움으로 살릴 수 있다는 식의 말-사실 이 말은 내가 직접 듣지 않았으므로 확신할 수 없는데, 혹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언제든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어려운 아이들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정말이지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그래서 그것이 고난주간과 어떻게 연관되냐는 것이다. 비록 암묵적 반 강제로 다 함께 일어서서 영혼 없이 읽을지언정,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 한 구절 되뇌어보지 않고, 하필 이 주에, 언제 재생하든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영상과 함께 후원을 요청해야 하냐는 것이다.

 

창업 브리핑은 어떠한가? 차갑게 말해, 우리는 등록금을 내고 거기에 맞는 정당한 권리로 학점을 채워 수업을 듣는다. 채플도 그런 수업의 일환이고, 그것은 엄연히 기독교 세계관의 형성 및 확립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특히나 매 학기 첫 채플 시간에, 이런 목적에 부응하는 수업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동시에 이 엄청난 강제적 필수성은 대부분의 한동대생에게 훌륭한 일방통행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사실 원한다면 언제든 총장님은 특별 강연을 열어서 들을 귀가 있는 학생들에게 값진 브리핑을 들려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채플에서 실리콘밸리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앞서 말한 채플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진 특징 때문이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얼마 후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과 댓글들을 보았다.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벽기도를 나가라는 댓글, 그래서 고난주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냐는 댓글, 이번 채플을 홍보라고 표현한 데에 대해 주관적 경험을 꺼내어 이를 한없이 객관화하는 댓글 등이 달려 있었다. 우선 채플은 새벽기도와 달리 마음 내키는 대로 출결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대해 마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식으로, 채플이 싫으면 새벽으로 떠나라는 말을 하는 것은 부적절할뿐더러,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다음으로, 그럼 고난주간에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적어도 어느 정도 떠오르는 이미지는 있지 않나. 하다못해 그다지 크게 어울리지 않는 주제 및 콘텐츠 정도는 다른 주에 둘 수 있지 않나. 굳이 하나님까지 올라갔다가 타자로 내려오는 거대한 연결고리를 걸어서까지 의미를 찾아나가야 할 정도의 주제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전인류적 스토리 안에서, 주님께서 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신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연관 지을 수 없는 주제는 어디 있겠는가. 이런 때에 필요한 것은 직접적 구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 말이다.

 

, 다시 말하지만, 아프리카 아이들은 죽게 내버려 두어도 좋다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다. 후원의 전달 및 그것이 실제 후원과 생명을 살리는 도움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생략한 채, 오직 생명과 단단히 결부되어 거칠게 펄떡거리는 절박함의 조각 하나로, 끊임없이 재생될 때마다 매번 그 현재에 못을 박으려는 저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그 반박 불가능한 실존의 논리라면, 북한과 중동의 어떤 나라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억압 및 죽음과 그 외 수많은 비민주와 불합리와 부조리와 폭력, 그리고 지금 저 길바닥에서 자식의 죽음에 대한 경위조차 알지 못해 충분히 슬퍼할 수 없어 머리를 깎는 어머니들의 이야기 역시 다루어져야 한다. 누군가의 주관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 섞인 주관이 객관에의 강요가 되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 된다.

 

글쎄, 넋두리로까지 보일 수 있는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왜 이렇게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디에 배신당한 걸까. 고난주간이고 뭐고 상관없는 내용으로 채운, 그러나 더 엄격한 출석기준을 가지며 그러면서도 강의평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수업, 또 이를 주관하는, 일반적 교무기관과 다른 어떤 성역과도 같은 그곳에 배신당한 걸까. 아니면,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안고, 그래도 예배로 여기어 보길 바랐던 내 헛된 믿음에 배신당한 걸까. 이 배신에 대해, 그래도 기도로써 준비한 건데 정죄하지 말고 넘어가자는, 그러니까 어떤 것과 다른 입장 표명을 정죄하는 목소리들에 배신당한 걸까. 여전히 알 수 없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한 학우와 이번 채플을 얘기하던 중, 그 사람이 얘기했다. ‘그냥 무엇보다도, 이런 채플 안에 갇혀버린 하나님이 불쌍하다. 아무래도 어떤 의미로든 언제든, 하나님은, 또 그가 육으로써 오신 본체이자 아들인 예수님은, 고난 받고 계시는 것 같다.

-채플. 교회. 예배당.(사진 출처: 우비청년 님의 티스토리 블로그 ‘in Frame…’)

 

흐드러진 벚꽃 위에는 회백색 흐릿한 하늘과 차게 젖은 공기가 감돈다. 이것이 불협화음인지 대위법인지는 알 수 없다. 한 주 내내 이어진 이 고난 같은 날씨가 끝나면, 그래도 부활처럼 봄이 다시 깨어날 것이다. 주말이 지나면 부활절이다. 이러나저러나 흘러가는 시간처럼, 주님은 그렇게 어쨌든 부활하셨고, 부활하실 것이다. 그 가운데 여전히 생각이, 당최 뭔지 알지 못하는 생각이 가득하다.



-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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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당나귀 귀 임금님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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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만 마음이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군요.

  2. 고난주간에그럼 무슨예배를 하기를 바라셨나요?? 나름총장님도 우리위해 애쓰신거고 설교하면 애들10에8은 고개를쳐박고있으니 저런연주같은거도 많이하는거고요 나름 다 생각하시고하는건데 너무 근거없는 비난이지 않나싶네요 그리고 중간중간에 글이 문장이 어색한부분들이 많네요 이러한 비판들이 한동을 발전시키기는 하지만 이런식으로 너무 극적으로 몰고가고 이런걸 이렇게 공론화시켜서 학교를 시끄럽게 만드는것이 과연무슨 좋은것이있나 싶네요 한국에서 남남갈등을 일으키고자하는 종북세력들과 다른점이 무엇인가 싶네요

    • 헌동인 2015.04.05 17:53 신고  Addr Edit/Del

      ㅋㅋㅋㅋㅋㅋ 종북타령 돋네. 시끄러운게 싫으면 듣지마 ㅋ 어차피 너 같은 애들이 지껄이는 가치는 거기까지야. 시끄럽게 논의하는 과정에서 해결책이 생기는거지 뭔 개소리를 하는거지 ㅋ 무균실에서 살다왔니;; 그냥 달린 손가락이라고 아무거나 써갈기면 되는줄 아는가본데 굉장하구나 니 수준.

    • 탈해 2015.04.05 18:58 신고  Addr Edit/Del

      먼저, 저는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고난주간에, 성경을 통해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총장님께서 애쓰셨다고 하셨는데, 그런 예배를 위해 애쓰셨다고 하기에는, 창업 박람회같은 브리핑(차마 설교라고는 못 하겠습니다.)은 좀 아니지 않은가 되려 묻고 싶습니다.
      10명 중 8명이 고개를 쳐박고 있으니 저런 연주라도 한다고 하셨지요. 대부분이 크리스천인 한동대학교에서, 그것도 채플 시간에, 왜 그렇게 '고개를 쳐박고' 있는지는 한 번쯤 고민해봄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장이 어색한 부분들은 기꺼이 지적해주시면,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혹시 이해가 안 되시는 것이라면, 제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풀어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극적으로 몰고 갔다고 하셨는데, 저는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극적으로 픽션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서투릅니다. 심지어 이번 채플은 픽션도 아니니 더욱 어렵지요. 혹시 글이 불러온 파장이 극적이라 생각하신 거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예상치 못한 극적임 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공론화로 학교를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슨 좋은 것이 있을까요. 이러한 비판들이 한동을 발전시키기는 하겠지요, 적어도.
      그리고 저는 한동인 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북세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한동대학교로 한정한다면, 저는 모종의 적그리스도 쯤 되려나요. 글쎄, 담담한 모태신앙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오해를 받는 거라면 퍽 아쉽습니다. 오히려 저는 갈등이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표현이 아니라, 차라리 '파장'이 일어나길 바라는 겁니다.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기꺼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함을 '종북세력' 운운하며 정죄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말이지요.
      아무쪼록 의견 감사합니다.
      평안하세요.

    • ㅇㄴ 2015.04.06 10:01 신고  Addr Edit/Del

      종북이라뇨 ㅋㅋㅋㅋㅋ ㅋㅋㅋ 글 제대로 읽고 쓰는 것 맞음?

  3. 12고영훈 2015.04.09 18:42 신고  Addr Edit/Del Reply

    글을 정말 깊이 이해하셔서 무슨 예배를 하기 바라냐는, 문장이 어색한 부분들이 많다는 지적을 하셨군요. 이해력에 깊은 감탄을 보냅니다.

  4. 임동진 2015.04.10 12:44 신고  Addr Edit/Del Reply

    종북 드립은 정말... 뭐만하면 종북타령이니 하는 이런 사람들도 우리나라, 기독교, 심지어 한동대에도 있다니! 심지어 이런 사람이 많다면 정말 노답이다! 화가난다!

  5. 한동인 2015.04.13 18:00 신고  Addr Edit/Del Reply

    좋은 글인 것 같아요. 우리 학교 채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6. 한동사람 2015.06.12 21:38 신고  Addr Edit/Del Reply

    많은 고민을 안고 나갑니다. 뭔가 사실 채플에 대해선 양가 감정이랄까? 그런 감정이 들어요. 그리고 저도 정말 채플이 한주의 중간에 주님의 은혜를 되새기고 기억할 수 있는 그리고 그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성경에 대해서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론 어려운 성경의 구절들의 해석과 설교를 하실 때면 보통보단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더라구요. 요즘 설교들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성경을 많이 모르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부한 답변같지만 성경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의 습관이 되길 바래 봅니다. 한명씩 마음을 잡고 채플을 변화시키기 시작하면 진정한 예배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